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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장 이야기 MOUNTAIN JOURNAL.KR

우리나라 산악문화의 발상지, 백운산장

1924년 이해문(李海文, 1代)이 터를 잡으며 시작된 백운산장은 지난 90여 년간 수많은 등산 동호인들과 함께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입니다. 1933년 이남수(李南壽, 2代)가 건축허가를 받아 석조 산장을 신축했고, 1942년에 우물을 팠으며, 1947년 한국산악회에 의해 증축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습니다. 1960년 서울산악회와 산악인들의 주도로 단층 석조 건물로 확장 재건축된 이후, 1992년 지붕이 화재로 불타자 1998년 이영구(李永九, 3代)와 산악인들이 힘을 모아 2층을 통나무로 중축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이곳 백운산장은 1971년과 1983년의 인수봉 조난사고를 비롯한 등산객들의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구조본부의 터전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산장인 백운산장은 우리나라 산악문화의 발상지이자 산악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우리 모두가 가꾸고 보존해야 할 북한산의 근대 문화유산이며 역사입니다.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에서 백운산장에 설치한 현판 내용 중

Since 1924

해발 650미터, 구름도 쉬어가는 서울에서 가장 높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와 매끈한 인수봉을 울타리처럼 두른 한 가운데에 우리나라 1호 산장이자 유일한 민간 운영 산장인 백운산장이 있습니다.

1960년대의 백운산장

백운산장의 역사는 근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갑니다.

조선왕조 오백년간 수도 한양의 북쪽을 두르는 진산이자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던 북한산은 종교와 신앙을 위해 은신하는 수도자나 지자유산을 노래하던 선비들만 찾을 뿐,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고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가 변화하며 서울에서 가깝게 갈 수 있는 북한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산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17년 매일신보에 실린 백운대 등산객들의 모습. 백운대는 조선왕조가 끝나고 북한산이 일반에 개방되며 서울시민들의 소중한 휴식처로 자리잡았으며 자연스레 산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최고봉 백운대는 누구나 오르고 싶어 하는 버킷리스트로 일제강점을 거치며 철로가 놓이고 접근이 편해지자 많은 이들이 북한산을 찾아 백운대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봄날 주말이면 전차를 타고 돈암동에 내리거나 경의선 열차에 올라 창동에 내려 우이동을 거쳐 백운대에 오르는 것이 당시의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백운대를 오르는 많은 이들은 백운봉암문(위문)을 거쳐 갔고, 자연스레 이곳엔 등산객들을 상대로 하는 작은 매점이 생겨났으니 1924년의 일입니다.

1933년 우리나라 1호 산장의 시작

처음 이 터를 닦은 사람은 경기도 장단 사람 이해문이었습니다.

백운암 움막에서 기도를 하기 위해 산골짜기까지 들어온 이해문은 백운대를 오르는 등산객들을 맞으며 길 안내를 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팔기도 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다 1927년 백운대에 지금의 철제 난간이 생겨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자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보다 튼튼한 건물이 필요해졌습니다.

백운대 철제 난간공사 완료를 알리는 동아일보 1927년 11월 13일자 기사

산속의 집이라는 뜻의 산장(山莊)은 등산이 처음 시작된 알프스에서 유래합니다. 산에 오르던 이들이 목동의 움막에서 비와 눈을 피하다 본격적으로 튼튼한 건물을 짓고 이곳에서 산악문화가 이어져온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바야흐로 1호 산장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해문의 아들 이남수가 북한산을 관리하던 경성영림서에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 산장 터 300평을 임대하고 이곳에 석조 건축물을 지은 건 1933년의 일입니다.

1933년 2대 산장지기 이남수가 경성영림서에서 허가 받은 백운산장 위치도.

북한산을 찾은 사람들은 이제 산속의 작은 집에서 따뜻한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비와 바람을 피해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조선인들의 산악회 백령회의 회원들이 1942년 산장 마당에 우물을 만들며 시원하고 깨끗한 물도 편하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955년 옛 백운산장(백운암)을 찾은 홍종인 한국산악회 회장(맨 오른쪽)과 김정태 선생(왼쪽 두 번째 모자쓴 이)

하지만 당시의 건축허가 문서만 최근 발견했을 뿐 사진자료 등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산악문화의 공간이라는 꿈

광복 이후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온전히 우리의 땅으로 돌아오며 백운산장에는 다시 산을 찾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립니다. 백령회원들이 주축돼 1945년 9월 15일 만든 조선산악회(1948년 한국산악회로 개칭)는 북한산에 나무를 심고 안내표지판을 설치하는 등 우리 산악활동의 고향이자 무대를 가꾸는 일에 앞장섭니다.

이런 속에서 1947년 조선산악회는 북한산 백운산장 증축을 과도정부에 제안하기도 합니다. 당시 송석하 회장 명의로 보낸 공문에는 백운산장 증축의 목적을 “산악인들의 이상향인 우리 문화시설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건전한 등산과 명승고적 산림애의 지도”라고 적고 있습니다.

1947년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가 작성해 과도정부에 보낸 백운대산장휴게소 건설 공문

산장이 단순한 휴게공간이나 숙박시설이 아니라 문화공간으로서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국의 광복처럼 부풀었던 산악인들의 꿈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3년 후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해 백운산장은 동족상잔 비극의 현장이 되고 맙니다.

현대사의 비극을 지켜본 백운산장

백운산장 마당 앞에는 특이한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한 ‘백운의 혼’이라는 이름의 비석입니다.

백운의 혼 기념비

1950년 6월 28일 퇴각하는 국군 장교와 연락병은 서울함락을 비통해하며 백운산장에서 권총을 쏘아 자결했습니다. 현 산장지기 이영구씨는 당시의 참상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며칠 뒤 두 청년의 시신을 우이동 사람들이 수습해 가매장했고 전쟁이 끝난 뒤 우이동에 무명용사묘를 만들어 이들의 뜻을 기렸습니다.

1959년이 되어서야 애국청년단체인 백운의숙에서 지금의 백운의 혼 추모비를 건립했으며 이후 백운의숙 청년부가 주축이 돼 만든 한넝쿨 산악회에서 매년 현충일마다 추모헌화 행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백운산장은 이렇듯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지켜보아온, 생생히 살아있는 공간입니다.

3대 산장지기 이영구 할아버지

1960년대 중반의 이영구 씨. 3대 산장지기로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1931년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이영구 할아버지는 15살 되던 1946년부터 백운산장에서 살며 한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등산객들에게 필요한 물건이며 음식을 지게에 지고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부터 걸어 오르며 한평생을 백운대와 인수봉 그늘에서 살아온 그는 김금자 할머니와의 결혼식도 이곳 백운산장에서 올렸습니다.

백운산장에서 산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이영구씨와 김금자씨의 결혼식.

산에서 조난자가 생기거나 사고가 있을 때면 무조건 달려갔던 이영구 할아버지가 살려낸 사람들은 줄잡아 100명이 넘을 정도로 그는 산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이영구 할아버지

북한산의 구조본부로 60여년

백운산장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들어선 건 1960년의 일입니다. 1959년부터 서울산악회 회원들이 주축이 돼 백운산장을 다시 짓기로 뜻을 모으고 북한산을 찾는 산악인들은 건축자재를 등에 지고 나르며 힘을 보탰습니다. 산장 건축에 쓸 모래와 시멘트를 운반하기 위해 백운산장을 거치는 코스로 등산대회를 열고 참가자들의 배낭에 조금씩 자재를 담아 나른 일화는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이렇듯 산을 찾는 모두의 조그만 힘으로 세운 백운산장은 이후 산악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산속의 휴식처, 또 대피처로 이어내려 왔습니다.

1959년 백운산장을 건설 중인 서울산악회 회원들

특히 1971년 11월과 1983년 4월 인수봉에서 일어난 대참사 때 백운산장은 구조본부로서 큰 역할을 했으며 3대 산장지기 이영구씨는 1946년부터 이곳에 살며 지금까지 100여 명의 등산객을 구조해 살려냈습니다.

하지만 1992년 등산객의 실화로 백운산장의 지붕이 전소하여 이후 다시 산악인들의 노력을 거쳐 1997년 2층 침상을 덧댄 지금의 모습으로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1993년 지붕 전소 후 임시 가림막을 해놓았던 백운산장

우리나라의 산악인들은 백운산장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고 눈 덮인 설산과 해외의 거벽으로 나아갔습니다.

등산인구 1800만의 시대, 백운산장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산악문화유산이며 우리 산악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온기가 배어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입니다.

1967년, 백운산장 앞에 선 서울산악회 회원들. 산장 문 위에 달린 새집들이 정겹다. 새도 먹고 나도 먹고 새도 살고 사람도 살고

백운산장 연혁

1924년 이해문 가족 백운산장 터에 거주 및 매점운영 시작

1927년 백운대 철제 난간 건설로 등산객 증가

1932년 이남수(이해문의 아들) 집을 짓고 가족과 함께 거주

1933년 경성영림서 허가로 석조 산장 신축

1946년 이영구(이남수의 아들) 산장 운영 시작

1947년 한국산악회 주도로 산장 중축

1950년 6·25 전쟁으로 일부 파손

1959년 홍지회(현 한넝쿨산악회) 산장 앞에 ‘백운의 혼’ 추모비 건립

1960년 서울산악회와 산악인들의 주도로 확장 재건축

1971년 인수봉 조난사고 구조본부

1973년 ‘백운의 혼’ 현충일 추모행사 시작

1974년 한국산악회 조난구조대 상주

1983년 인수봉 조난사고 구조본부

1992년 지붕 전소

1998년 2층으로 재건축

2008년 ‘백운의 혼’ 추모비 국가 현충시설 지정

The story of Baek-Woon Mountain Hut

Baek-Woon Mountain Hut is the cradle of Korean mountaineering culture.

The hut, where Hae-Moon Lee(1st generation) 1924, has been a living witness, together with millions of mountaineers, watching the Korean mountaineering history over the past ninety years, Nam-soo, Lee(2nd generation) built a stone-hut under the government permission in 1933, and dug a well in 1942. he hut was extended mostly by the Corean Alpine Club in 1947, and partially destroyed during the Korean War.

Seoul Alpine Association members and other mountaineers re-enlarges it into a one-story stone building in 1960. After the roof was burnt down in 1992. Young-Goo, Lee(3rd generation) and some mountaineers built its second story by logs, which completed the hut as it is. Whenever carious accidents happened at insoo-Bong, including the ones in 1971 and 1983, this hut used to be a command post. Baek-Woon Mountain Hut, the first and oldest one in Korea, is the homeland of Korean mountaineers as well as the cradle of Korean mountaineering culture. This hut should be kept and preserved, because it is the modern cultural heritage of Mountain Bu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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