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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구간 황악산 백두대간 에코 트레일. 05

표지 : 황악산을 넘어 괘방령으로 내려서는 길. 오후 6시의 햇살과 버려진 밭을 메운 강아지풀이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왔다.

바위 없어도 “악”소리 나는 황토 대간길!

글 월간산 신준범 기자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 가르는 우두령~황악산~괘방령~추풍령 24㎞

긴 여름이었다. 투명한 가시를 곤두세운 햇살이 따갑게 피부를 찌르고 있었다. 여름이 오고 다시 여름이 가고, 그 속에서 걷고 또 걸었다. 걷는 내내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땀을 철철 흘리며, 서로를 지탱했다. 길목 어디선가 희미한 바람 한줌 부는 고개라도 만나면, 얼마나 크게 웃음 지었던지…. 이제 누군가 “황악산”하고 발음하면 잔혹했던 그 여름과, 굴참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이 생각날 것 같다. 오후의 햇살 한줌과 함께 찾아온 눈부신 바람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웅장한 여름 마왕이었다. 김천에 들어서자 제왕 격의 산이 거대한 산세로 자리를 잡고 있다. 짙은 초록의 웅장한 육산, 무더위의 무게를 압축시켜 놓은 것만 같다. 시내의 평균 고도는 50~70m, 황악산 높이는 1,111m. 강원도 첩첩산중의 여느 고산보다 더 큰 몸집이다.

우두령에서 추풍령까지 간다. 첫날에 괘방령까지 13km, 이튿날 추풍령까지 11km를 갈 계획이다. 익숙한 얼굴들이 우두령에 모였다. 지난 구간 함께했던 김천산악연맹 전무이사 김찬일 블랙야크 셰르파와 덕유산 구간에 참여했던 변재수 셰르파, 꾸준히 함께 해온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박용희 국장이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우두령에는 어르신들이 돗자리를 깔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해발 730m 고개에 온 까닭은 바람길이었기 때문이다. 폭염이 맹위를 떨치면서 언제부턴가 우두령이 노인정 역할을 하게 되었단다.

수북한 산악회 표지기를 따라 산에 든다. 급경사와 날벌레들이 반갑지 않은 환영인사를 한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며 870m봉에 닿자, 경치는 없지만 벤치가 있다. 숨 좀 돌리려는데 앵앵거리는 벌레들이 성가시게 구는 통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폭염 경보가 내린 날답게 산행 시작 30분 만에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곰발바닥처럼 큼직한 잎의 떡갈나무들이 많다. 잎을 한 장 뜯어 벌레도 쫓고 부채로도 써보지만 가파른 오르막에 거추장스러워 버리고 만다.

지도에 표시된 삼성산은 실제론 봉우리다운 맛이나 표지석이 없으나, 삼성암에서 울려오는 염불 소리에 산 이름의 의미를 되새긴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약사여래 삼불을 모실 명당을 찾다가 금오산과 수도산, 이곳 삼성산을 택해 약사암, 수도암, 삼성암을 짓고 약사여래를 봉안했다는 설화가 있다. 그래서일까 염불 소리가 유난히 산 전체를 울리는 것 같다.

처음으로 경치가 터진다. 능선 왼쪽은 충청, 오른쪽은 경상도인데 김천 땅이 멀리까지 드러난다. 카랑카랑한 햇살에, 몸이 경치 구경을 거부한다. 첫 1,000m대 봉우리로 진입한다. 여정봉(1,030m)은 특별한 유래는 없으나 ‘황악산 가는 길의 여행 중 거쳐 가는 봉우리’ 정도로 풀이한 내용이 해설판에 적혀 있다. 작은 봉우리지만 그늘과 벤치가 있는 것만으로 여정의 충분한 쉼표가 되어 준다.

1,000m대로 고도를 올리기 위해 흘린 땀이 몇 컵은 되는데, 대간은 버리라고 한다. 내리막을 따라 830m까지 고도를 내리자 바람 없는 바람재다. 예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어 풍령風鈴이라고도 불렸으나 지금은 사우나처럼 열기로 가득하다. 바람재 표지석 글자가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누워 있어 이채롭다. 김천산악연맹 임재하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한 김천 산꾼들의 노력으로 세운 것이다. 백두대간 김천 구간에서는 뒷면에 ‘김천 산꾼들’이라 적힌 표지석을 숱하게 만나는데 모두 임재하씨의 오랜 노력 덕분에 생명력을 얻은 산과 고개들이다. 지면을 빌어 임재하 사무국장과 김천 산꾼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황악산 구간은 시원한 경치는 드물지만 숲이 짙어 산행 내내 그늘을 내어준다.

덤불이 산길을 막은 곳에선 불가피하게 칼로 쳐내며 운행했다.

짙은 여름 숲을 즐기며 산행하는 변재수(앞) 셰르파와 김찬일 셰르파.

등산객 한 명도 없는 100명산의 산

넝쿨과 수풀이 길을 숨겼다. 지난달 제법 고생을 했기에 이번에는 아예 정글칼을 가져왔다. 기자가 선두에서 러셀하듯 넝쿨을 치면, 주민욱 사진기자에 이어 셰르파들이 오는 방식이다. 인터넷에서 값싼 중국산 칼을 샀더니 무겁기만 하고 효과가 크진 않다. 그래도 가시에 찔리는 것 보단 낫다.

진짜 산행은 지금부터다. 이번 구간 최고봉 황악산(1,111.4m)을 곧장 치고 오르는, 된비알이다. 노란 역삼각형으로 꽃을 피운 마타리의 응원을 받으며 직진한다. 황악산은 100명산에 포함되었지만, 특징 없는 큰 육산이라 재미는 적고 산행은 힘든 곳으로 손꼽힌다. 직지사 원점회귀가 일반적인데 12km로 짧지 않지만 대부분 급경사이고, 경치가 터진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심장을 삼킬 듯 차오르는 오르막은 끝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낫다. 곧 끝난다고 여기면, ‘왜 아직 멀었지’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 힘들게 된다.

가파른 만큼 성취감이 큰 정상은 시원한 맛은 없지만 표지석, 안내판, 돌탑, 벤치, 삼각점 등 있을 건 다 있다. 과거 학이 많이 살아서 황학산黃鶴山이라고도 불렸으나 산보다 더 유명한 천년사찰 직지사는 황악산黃嶽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택리지>에도 그리 표기되어 있다. 산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면 산행이 어려운 험한 바위산이라는 속설이 있지만, 황악산은 산행이 어려운 흙산이라 반만 맞는 셈이다. 짙푸른 신갈나뭇잎 사이로 살짝 낮은 첩첩산중이 드러난다. 폭염 탓에 풍경마저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다. 뙤약볕에 노출된 바위산이 아님을 감사한다.

오늘은 등산객이 한 명도 없지만, 100명산에 속한 산답게 등산로는 잘 나 있다. 피 같은 고도를 뚝뚝 떨어뜨린다. 간혹 경치가 열린 곳에서는 비닐하우스가 넓게 자리 잡은 걸 볼 수 있는데, 김천의 명물인 포도 농장이다.

직지사 하산길을 지나자 산길은 낮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여우가 많이 살았다는 여시골산, 지금은 굴참나무가 주인이고 대간 종주자들만 가끔 지나갈 뿐이다.

주민욱 기자의 얼굴이 어둡다. 워낙 숲이 짙어 멋진 사진을 찍을 만한 장소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위로처럼 묵은 밭이 나타나 시야를 틔운다. 온갖 풀들이 점령한 초원과 힘 있게 솟은 가성산, 구도를 누군가 잡아놓은 것마냥 황금비율의 풍경 속으로 오후 6시의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김천 토박이 김찬일 셰르파는 산과 가까운 밭일수록 손이 많이 가서 고령화된 농촌에서는 일손 부족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세상이 다 경제성으로만 돌아갈 순 없다. 산등성이 밭도 그동안 양분이 다 빠지도록 열심히 일했으니, 자연 자체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버려진 밭을 걷는 두 사내가 있는 풍경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대간꾼들의 베이스캠프인 괘방령산장에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냉기가 덮쳐왔다. 이렇게 황홀한 시원함이라니,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주인장이 주는 시원한 얼음물을 들이키고 꽉 조인 등산화 끈을 풀고 약속이나 한 듯 다들 퍼질러 있었다. 노곤하지만 더 없이 행복한 산행의 여운을 음미하고 있었다.

배려심 있는 산장부부 덕택에 꿀맛 같은 잠, 꿀잠을 자고 다시 등산화 끈을 질끈 묶었다. 밤새도록 비가 쏟아지더니 해가 뜨자 그쳤다. 이번 구간은 비가 안 오나 했는데, 역시 비가 왔다. 우리가 지난달 김천을 떠난 후 처음 내린 비라고 하니, 여름 가뭄에 내린 단비다.

역습이다. 유명한 산도 없고, 700m대 산이라 가볍게 봤는데, 어렵다. 성질 급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어 체력과 인내력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또 비온 뒤의 높은 습도, 집요한 날벌레가 버무려져 산행 시작 30분이 못되어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헉헉 거리는 꼴이 되었다.

그래도 안개 낀 숲은 아름다웠다. 굽은 소나무와 물기 머금은 떡갈나무, 푹신한 껍질의 굴참나무, 큼직한 생강나무 잎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만큼 더 싱그러웠다.

시멘트로 바닥을 깔아 모처럼 풀들의 간섭이 없는 가성산 정상에서 점심을 먹는다. 김천산악연맹 김찬일 셰르파가 손님을 대접한다며 점심을 메고 와주었다. 힘도 장사지만, 마음 씀씀이도 못지않다. 장군봉 넘어 눌의산(743.3m)에 오르자 모처럼 정면으로 시야가 트인다. 당분간 대간은 한층 낮아진다고 엎드린 산줄기들이 일러준다. 헬기장의 노란 달맞이꽃은 더위에 지친 듯 고개를 숙였다.

이제 추풍령까지 내려서는 능선 하산길만 남았다. 산행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지만 대간은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과거를 보러가는 유생이 이곳을 지나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우회했다는 추풍령이지만, 지금은 온갖 이동수단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경부선 철로, 경부고속도로, 4번국도가 고개를 동시에 지나는 통에 지하도로 우회해 추풍령 기념탑에 닿았다.

직지사에 머물던 사명대사가 여름에 이곳을 지날 때 마치 가을바람처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하여 추풍령秋風嶺이라 이름 붙었다는데, 오늘은 끝까지 함께한 일행들의 웃음이 그 바람을 대신한다. 햇살은 뜨거워도 성취감에 속은 시원하다.

산의 큰 덩치만큼 웅장한 표지석이 있는 황악산 정상. 그늘과 벤치가 있어 쉼터로 좋다.

여우가 출몰했다고 전하는 여우굴.

쓰러진 나무를 지나는 변재수 셰르파. 서울시산악연맹 학술문화위원이며 숲길등산지도사 자격을 가진 베테랑이다.

특이하게 휘어진 참나무가 산길의 작은 볼거리가 된다.

전반적으로 육산이라 위험한 곳은 없지만 가파른 오르내림이 이어져 산행이 쉽지만은 않다.

1, 2 : 눌의산을 내려와 추풍령으로 향한다. 경부고속도로 아래로 이어진 지하도와 경부선 철길 아래를 연이어 지나야 추풍령 기념탑 앞에 닿는다. 3 : 추풍령이 다가오자 모처럼 숲이 열리고 하늘이 드러난다. 추풍령으로 내려서기 직전, 길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황악산산 구간 종주 가이드

만만해 보이지만 만만치 않다. 황악산은 가파르기로 소문난 육산이고, 가성산과 눌의산은 오르내림이 심한 산이다. 큰 고개마다 도로가 있어 구간 나누기는 수월하다. 우두령에서 황악산 넘어 괘방령까지 13km, 괘방령에서 눌의산 넘어 추풍령까지 11km로 이틀에 나눠 종주할 수 있다.

산길은 전반적으로 양호하다. 대간꾼 외에는 다니는 이들이 없다시피한 삼성산이나 여시골산, 눌의산도 등산로가 선명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간간이 넝쿨이 우거진 곳이 있지만 지난달에 갔던 석교산 대간길에 비하면 어렵지 않다. 다만 눌의산에서 추풍령으로 내려갈 때 사유지와 겹치면서 우회로를 따르게 되는데 이때 길이 희미해진다. 풀이 높게 우거진 임도를 따라 끝까지 가면 산림청 백두대간 추풍령 안내판에 닿는다. 왼쪽의 포도밭을 따라가다 지하도를 지나면 추풍령 기념탑에 닿는다. 산행의 수고에 비해 경치가 터진 곳이 드물고 화려한 바위가 없어 자칫 지루할 수 있다.

숙식(지역번호 054)

도로가 지나는 우두령에는 숙소나 식당이 없다. 비교적 가까운 김천 지례면사무소 인근에 식당이 많다. 지례는 TV프로그램 ‘수요미식회’와 백종원의 ‘삼대천왕’에도 소개되었던 흑돼지가 유명하다. 연탄불에 구운 양념 불고기와 삼겹살, 왕소금구이가 별미다. 장영선원조지례불고기(435-0067), 두꺼비불고기식육식당(434-1088), 돌목불고기식당(435-0758) 등이 있다.

괘방령에는 식당과 숙소를 겸한 괘방령산장(010-5281-8008)이 있다. 대간꾼들이 즐겨 찾는 쉼터로 대간상에 있어 접근이 편하고 음식이 맛깔 난다. 예약이 필수다.

추억을 만들어주는 괘방령의 신바람 부부

괘방령 산장 백기성•전영애씨

산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간종주꾼들이 벽에 쓴 빼곡한 글귀가 이곳을 대변한다. 대간상에 있어 대간 종주인들의 접근이 수월하고, 음식 맛이 좋고, 부부가 잔정이 많아 하룻밤 묵고 떠날 땐 다시 찾겠다고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런 사연들,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의 이름들로 가득 메운 괘방령의 명물이다.

김천 토박이인 백기성·전영애 부부는 10년 전 이곳에 처음 둥지를 틀었다. 스스로 “딴따라였다”고 웃으며 말하는 백기성씨는 기타 연주가였다. 전국을 누비던 그는 지병이 있어 공기 좋은 곳에 정착하고자 들어왔으며, 백두대간 기운 덕분인지 지금은 “훨씬 좋아졌다”고 한다. 연주 실력만큼이나 손재주가 좋은 그는, 건축 관련 경험이 전혀 없었으나 3년을 노력해 지금의 통나무집을 혼자 힘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손님을 받는 산장이 아니었으나 대간을 타는 이들이 자주 들렀고, 어떤 이는 산장을 해보라고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이후 산장을 개업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으며, 산장개업을 충고했던 이를 비롯해 많은 단골 산꾼이 생겼다고 한다.

“벌이를 따지면 버스 타고 오는 산악회가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4명 이하 손님이 좋아요. 단체 팀은 우르르 몰려와서 산행하고 밥을 먹지만, 정작 여기가 어딘지, 무슨 산인지도 몰라요. 사람 수가 적으면 이런저런 얘기도 나눌 수 있어 좋지요.”

땀에 젖은 산꾼들이 숱하게 거쳐갔지만 비교적 시설은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음식도 깔끔하고 그 양도 적지 않다. 부부의 성격이 깔끔해 청결하고 음식 맛도 좋은 편. 부부는 백두대간을 완주한 건 아니지만, 봄나물이 날 때나 가을 버섯철에는 대간꾼 못지않게 산을 누빈다. 안주류는 닭도리탕, 제육볶음, 닭백숙이 있고 정식은 찌개와 제철 나물 반찬이 나온다.

괘방령산장에서 잔다면 이곳 산세가 밋밋하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유머러스하고 서비스 좋은 부부와 술 한 잔 하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괘방령의 신바람 나는 밤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