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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이작도 섬앤산

고운 물결무늬로 가득한 풀등을 걷는다. 썰물이 되면 육지가 되고 밀물이 들면 바다가 되는, 섬도 바다도 아닌 곳이 풀등이다.

글 신준범 차장대우 사진 주민욱 기자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바다사막'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서해 먼 바다에 썰물 때만 드러나는 모래섬이 있다.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섬. 모래섬이 어찌나 넓은지 ‘바다 사막’이라 부르는 이도 있으며, 보통은 ‘풀등’이라 했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로 시작하는 소설 <죽음의 한 연구>처럼 매혹적인 수수께끼 같았다. 풀등의 존재를 알고부터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바다사막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미 첫 문장을 읽어 버렸고, 돌아갈 길은 없었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무언가 안에서 차오른 것마냥 “풀등을 걷고 싶다”고 내뱉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기겠지만, 길을 가다가도 부지불식간에 딸꾹질처럼 튀어 나왔다. 풀등을 걷고 싶다.

미리 알아본 바로는, 풀등은 갈 수 없었다. 지금은 운항하는 배편이 없다고 했다. 일단 대이작도로 갔다.

날씨는 화창했고, 파도는 잔잔했다.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이하영씨와 강태선 나눔재단 변별씨가 여행 온 대학생 커플마냥 철부선 갑판 위에서 바람을 쐬며 희희낙락 하고 있었다. 이때는 몰랐다. 그 섬에 갇히게 될 줄은….

바다를 가까이서 즐기기 위해 해변 바윗길을 걸었다. 썰물일 때 최고령암석 방면에서 작은풀안해수욕장으로 이런 바윗길을 따라 넘어갈 수 있다.

안산 대부도 방아머리 선착장

1시간 40분 만에 닿은 대이작도大伊作島는 신비롭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1967년 개봉한 영화 ‘섬마을 선생님’ 촬영지임을 알리는 선착장의 낡은 글귀처럼, 평범한 시골 섬이었다. BAC 인증지점인 부아산 산행을 하고 작은풀안해수욕장에서 야영 후 송이산 산행을 하고, 오후 배를 타고 돌아가는 1박2일 일정이다.

대이작도는 해적의 섬이었다. <고려사>에 ‘왜구들이 이 섬을 점거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는 근거지라 이적夷賊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작은 무리의 해적이 이작도를 은신처로 삼았다고 한다. 이적도란 이름이 이작도로 변한 것이며, 큰 섬을 대이작도, 작은 섬을 소이작도라 부른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에 속해 있으며, 전체 넓이 2.57km², 해안선 길이 18km의 작은 섬이다. 볼거리는 적지 않아 해수욕 가능한 모래해변만 4곳이며, 부아산과 송이산도 높이는 낮지만 소소한 산행의 재미가 있다. 여기에 짧은 해안데크길도 섬 곳곳에 5군데로 나뉘어 있어 당일에 모두 둘러보기는 무리다.

선착장 한편에 해안데크길 입구가 보인다. 소이작도가 마주보이는 데크길의 유혹, 일단 부아산 산행은 제쳐 두고 데크길로 든다. 소사나무 신록이 아기 손바닥마냥 앙증맞은 잎을 뻗고 있어 걸을수록 유쾌해진다. 소이작도는 잠깐 수영하면 건널 수 있을 듯 가깝지만, 바닷물이 태풍의 눈처럼 빠르게 소용돌이 치고 있어 얼핏 봐도 위협적이다.

부아산 중턱의 비포장임도. 산 높이는 낮지만 식생 보전이 잘 되어 있어 숲이 풍성하다.

전망데크에 농어바위 안내판이 있다. 대대로 농어가 잘 낚이는 곳이라 이름이 유래하며 지금도 섬 근해에서 농어가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오르막 계단을 올라서면 선착장이 잘 보이는 ‘문희 소나무’ 언덕이 있는데, 당시 영화에 출연했던 섬처녀 역을 맡은 배우 문희가 떠나는 총각 선생님을 아련히 바라보던 곳이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형제바위 해안데크길로 든다. 소나무와 소사나무가 ‘장군! 멍군!’을 외치며 팔을 뻗어 햇살을 양분한다. 그 아래로 난 데크길 옆으로 코발트블루의 바다가 펼쳐진다. 걸음걸음이 달콤해 대이작도에선 세월이 흐르지 않는 것만 같다. 데크 끝에서 만난 오형제바위는 슬픈 불꽃같았다.

옛날 효심이 지극한 다섯 형제가 고기를 잡으러간 부모님을 여기서 기다렸다고 한다. 악천후에 바다에 나간 부모는 돌아오지 않았고 오형제는 슬피 울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 이후 오형제바위 부근에서 사고가 잦아 한 해의 마지막 날엔 이곳에 주민들이 모여 기원제를 올린다고 한다.

부아산 정상부의 구름다리. 부아산 정상에는 전망데크, 봉화대, 팔각정 등 볼거리가 많다.

텐트 펙을 뽑아버린 막강한 강풍

데크길을 버리고 산길로 든다. 초록으로 가득한 소박한 숲길이 반갑다. 꾸준히 오르막이 이어지지만 봄꽃 향기가 배어 있어 다가오는 느낌이 다정다감하다. 분홍빛 병꽃나무, 줄딸기꽃이 청아한 시골처녀라면, 반디지치는 요정처럼 기묘한 보랏빛으로 산길에 낭만을 더한다.

159m로 정상은 낮지만 선물세트 같았다. 데크 전망대와 톱날 같은 자연 바위에 새긴 정상 표지석, 5개의 봉화대, 망원경이 있는 팔각정, 구름다리까지 높이에 비해 볼거리가 과할 정도로 많다.

BAC인증지점인 부아산 정상 표지석. 전망데크로 가는 길목에 있고, 자연바위에 글자를 새겨 그냥 지나치기 쉽다.

정상 표지석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내려서자 산간도로로 연결된 주차장과 공원이다. 팔각정이 워낙 많아 여간한 정자는 그냥 지나친다. 산길로 내려서자 묘한 곳이 있었다. 은은한 갈대 습지와 자갈해변, 버려진 통나무 더미가 바닷바람과 잘 어울렸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버려진 해변 어딘가에 늙은 어부가 초점 없는 눈으로 바다를 응시할 것만 같았다.

부아산 정상부는 유일한 암릉지대이다. 부아산과 송이산 모두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초보자도 어렵지 않다.

송이산 산길 이정표가 있으나 오늘 산행은 접고 야영 준비를 하기로 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백패킹 명소인 작은풀안해변 소나무숲에 텐트를 쳤다. 해변은 그림 같았고 소나무숲은 아늑해 텐트 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최신 시설은 아니지만 고장 난 곳 없이 관리된 화장실, 물이 콸콸 나오는 개수대, 쓰레기 분리시설이 넉넉한 이곳 인심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밤 사이 막강한 손님이 불쑥 찾아왔다. 적당히 박은 펙peg은 모조리 뽑아버릴 정도의 강풍이었다. 아침이 되자 배편 선사에서 ‘풍랑주의보로 오늘 배편은 모두 결항되었다’는 메시지가 왔다. 고민할 겨를 없이 휘날리는 텐트를 접었고, 일단 산행에 나섰다.

서정적인 풍경의 작은풀안해수욕장. 해양쓰레기 없이 단단한 모래와 바다가 있는 감미로운 해변이다.

공문空門의 경지에 이른, 있으면서 없는 풀등

송이산(188m)은 부아산보다 겨우 30m 높지만, 제대로 된 산행 느낌이다. 좁고 가파른 산길은 내륙의 큰 산을 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잠시나마 들었다. 부아산은 시설물이 많아 인공적인 이미지라면 송이산은 육산이지만 때 묻지 않은 진짜 산행이다. 정상엔 역시 팔각정이 있었고, 해무에 휩싸인 경치도 멋있었다.

작은풀안해변 방면 마을로 하산해 풀등식당펜션에서 푸짐한 백반을 먹었다. 장봉도에서 대이작도로 시집 와서 30년 넘게 식당을 꾸린 사장님께 풀등으로 갈 방법을 물었더니, 고기잡이와 펜션 운영을 도맡고 있는 아들을 소개해 주었다. 아침 7시와 저녁 7시에 풀등이 떠오르는데 오늘 저녁 파도가 높지 않으면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감사를 전하며 펜션에 짐을 풀었다.

계남마을 해안숲길의 벤치에서 숨을 돌리는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이하영씨와 강태선나눔재단 변별씨(왼쪽). 대이작도는 잔잔한 숲길과 해안데크길이 많아 여러날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다.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행여 배가 못 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었으나, 풀등펜션 아들은 약속을 지켜 주었다. 가까워 보였지만 섬에서 1㎞ 떨어져 있었다. 배가 모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릎 높이의 수면에 내려 주었기에 다들 맨발로 내렸다.

순수한 바다 사막에 착지하는 순간, 짜릿했던 그 차가움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마치 미지의 땅에 내려진 첫 사람처럼, 바다도 아닌 섬도 아닌 순수한 모래 느낌은 잊을 수 없다. 해변에서 보았을 땐 작아 보였는데, 막상 닿은 풀등은 광활했다. 모래는 단단해 발이 빠지지 않아 걸음이 경쾌했다.

작은풀안해수욕장 소나무숲에서의 야영. 백패킹 명소로 손꼽히며, 섬에서 유일하게 야영이 허가된 곳이다.

바닥은 온통 물결무늬로 가득 차 있어 풀등 자체로 거대한 작품이었다. 바람은 인정사정 없었으나 감미로운 해넘이와 바다사막의 조화는 꿈만 같았다. 흰 포말로 물러나는 썰물에 사막은 점점 넓어졌고, 비어 있으나 가득한 공문空門의 경지에 이른 바다는 말로 표현할 길 없었다. 언제까지나 걷고 싶었으나 “오래 머물 수 없다”고 당부한 선주의 말이 맴돌아 이내 배에 올라탔다. 풀등에 남겨진 내 발자국이 보였다. 밤사이 심해에 잠기는 꿈을 꿀 것 같았다.

다음날도 배는 뜨지 않았다. 고립된 채, 엄청난 바람 속에서 풀등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고래가 떠오르고 있었다. 고래 등에 올라탔던 신선한 기억은 꿈결 무늬로 가슴에 남았다. 지금도 풀등을 걷고 싶다.

부아산과 송이산 사이 무명 해변을 걷는다. 두 산 사이에는 쓸쓸한 느낌이 드는 운치 있는 억새 해변이 있다.

[섬 가이드]

백패킹 명소이지만 당일 산행도 가능하다. 선착장에서 오형제바위까지 갔다가 산길로 부아산을 거쳐 송이산 정상에 오른 후 작은풀안해수욕장에 들렀다가 도로를 따라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은풀안해수욕장에서 해안선의 걷기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운치 있지만, 작은풀안해수욕장에서 썰물 때 해변 바윗길을 통과해야 한다. 해변 바위에는 이정표나 정비된 데크길이 없다.

오형제바위 해안데크길 입구에서 부아산 정상까지 1.7km, 여기서 송이산 사이의 해변까지 850m, 여기서 송이산 정상까지 750m이다. 정상에서 조금 되돌아가서 작은풀안해변 방면 산길로 600m 내려서면 도로에 닿는다. 총 4km이며 섬 내에는 펜션에서 숙박객을 운반하는 차량 외에 별도의 버스와 택시가 없어 도로를 따라 선착장으로 걸어가야 한다. 송이산 하산 지점에서 선착장까지 도로 따라 2km이며 40분 정도 걸린다.

BAC 인증지점

부아산 정상 표지석 좌표 37.178484, 126.259706

교통(지역번호 032)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1599-5985)과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 대이작도행 배편이 운항한다. 안산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는 평일 1회(09:00), 주말 2회(08:30, 12:50) 운항하며 1시간 40분 걸린다. 대이작도에서 나오는 배편은 평일 1회(15:00), 주말 2회(10:40, 15:00) 운항한다. 편도 요금 9,800원이며 차량 편도 요금 4만2,000원. 문의 대부해운(887-6669).

인천에서는 평일 3회(07:50 대부해운, 08:30 고려, 15:00 고려)과 주말 3회(토요일 15:00=>12:00 출발, 일요일 15:00=>14:00) 운항한다. 인천에서 매일 2회 정도 출발하는 고려고속훼리편(1577-2891)은 1시간 10~20분 소요. 요금은 편도 2만1,600원이며 차량은 실을 수 없다.

본 기사는 월간산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