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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섬앤산

육지와 제주 사이 망망대해에 자리한 추자도는 물빛도 하늘빛도 깨끗하다. 하추자도 예초리 해안 너머로 추포도와 횡간도가 고즈넉하게 능선을 이었다.

글 신준범 차장대우 jbshin@chosun.com / 사진 주민욱 기자 minwook19@hanmail.ne

나바론 절벽에서 보내온 편지

육지와 제주 사이 망망대해의 깨끗한 섬 올레18-1코스

추자도 취재를 함께한 신세대 트로트 가수 손빈아씨가 돈대산 정상으로 이어진 올레길을 걷고있다. 그는 지금 백두대간을 종주중이다.

처음 만나는 파랑이었다. 이것이 원래 하늘빛인가 싶었다. 저토록 섬세한 구름의 붓질을 본적 있었나. 바다는 이토록 투명한 것이었나. 서울에서 본 적 없는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널려 있었다. 햇살은 쩌렁쩌렁 고요히 힘자랑하고, 시골 새끼 강아지 같은 바람이 얼굴을 핥고 지나갈 때, 코끝이 찡하게 훅 덮쳐오는 바다냄새. 살아 펄떡이는 바다가 내게 깊숙이 스며들어왔다. 갇히고 싶은 섬이었다.

돈대산 정상이 가까워 오면 풍경의 쾌락도 점점 커진다. 멀리 추자도 상가 밀집지역인 여객선터미널 일대가 드러난다.

이상하게 애틋하다. 추자도 선착장 말이다. 복고풍의 애달픈 트로트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섬 처녀가 어디선가 보고 있을 것만 같은, 영화에서 봤음직한 장면들. 지금처럼 빠른 배가 다니기 전에는 섬을 오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 수백 년은 되었을 이별의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추자도에 어울리는 신세대 트로트 가수와 함께 왔다. 지리산이 집 뒷산인 하동군 악양면이 고향인 손빈아(30)씨, 그의 기획사 대표인 노규선(55)씨와 함께한다. 섬산이라 해도 본지 취재는 여느 산꾼들처럼 종일 걷는 것이라, 산 좋아하는 이미지를 홍보하고 싶은 체력 약한 사람이면 어쩌나 염려했으나, 모처럼 준수하고 건강한 생각을 가진 산 청년이었다. 노규선 대표는 열혈 등산 마니아로 기획사 상호가 ‘마운틴엔터테인먼트’이다. 코로나로 행사가 뜸한 요즘은 주2회 두 사람이 대간 종주를 하고 있다.

연예인이라 해서 특별대우는 없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오히려 추자도 비경을 즐기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숙소에 짐을 풀고 부산에서 온 후덕한 낚시꾼의 트럭을 얻어 타고 추자대교로 갔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유일한 다리이다. 선착장과 식당·민박 같은 시설은 상추자도에 밀집해 있지만 하추자도가 두 배 이상 크며, 최고봉이자 BAC인증지점인 돈대산燉臺山(164m)도 하추자도에 있다.

트랑고타워 닮은 카리스마 있는 무인도

큰 섬을 오늘 걷고, 작은 섬을 내일 걸을 요량이다. 올레길을 따라 하추자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다만 봐도 감탄이 난다. 잘 쓰지 않는 색깔을 이르는 말로, 비취색이 있다. 단순히 파랗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비취옥의 빛깔. 투명하고 영롱해 바다만 봐도 마음이 상쾌해졌다.

산길로 들고 싶었으나 ‘낙석으로 통제되었다’는 출입금지 안내판이 도로로 이끈다. 얼마 안 가 다시 산길. 얕은 숲길은 거미줄과 모기의 등쌀에 제대로 숲을 음미하기 어려웠다. 정수장을 지나자 제대로 된 숲길이 손짓하고, 돈대산 입구의 정자에 먼저 온 사내가 숨을 돌리고 있다.

그는 26일간 제주 올레를 하루에 한 코스씩 걷고 마지막으로 추자도(올레 18-1구간)를 찾았다며 “이제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러 가야겠다”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올레길처럼 풍광 좋은 자연을 홀로 걸으면, 그 어떤 슬픔도 햇볕에 말릴 수 있게 된다.

의외로 운치 있다. 발 디딤 푸근한 숲의 터널이 무장 해제시키며, 마음의 짐은 두고 오라 권한다. 묵리고갯마루에서 진짜 산행이 시작

돈대산 정상 개괄지 뒤로 신양항이 아기자한 색깔로 드러난다.

된다. 꼴딱꼴딱 숨이 차오를 때쯤, 전력으로 달려와 안기는 깨끗한 바람과 추자군도. 42개의 섬이 추자도를 에워싸고 있으며 그중 38개 섬이 무인도다. 제주시 추자면에 속하지만, 육지와 제주 가운데에 추자도가 있다. 제주와의 거리가 40km가 넘고, 육지와도 40km가 넘어, 망망대해에 추자도가 있다. 그래서인지 깨끗하다. 길거리에 쓰레기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빛과 바닷물빛이 다르다.

추자도 최고봉인 돈대산 정상에 선 손빈아(왼쪽) 가수와 노규선 대표. 정상에 경치 좋은 정자가 2곳 있다.

높이 164m라 믿기지 않을 만큼 정상 경치가 다채롭다. 손 큰 주인장이 내어놓은 잔칫집 상차림마냥 동서남북 맛이 다른 풍경의 쾌락을 내어준다. 팔각정 정자 2곳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조금 왜소한 정상 표지석이 있다. 아래로 색색깔 지붕이 모자이크 작품처럼 고운 신양리마을과 항구가 드러나고, 유독 시선을 끄는 무인도가 있다. 트랑고타워처럼 거침없이 솟은 바다의 첨봉, 수덕도이다. 마치 사자가 고개를 들고 앉은 모양새라 하여 ‘사자섬’이라고도 불린다.

올레길은 곧장 산을 내려서 해안가로 이끈다. 추석산 자락을 지나 예초포구로 이어진다. 추석산(155m)은 추석날 주민들이 음식을 싸들고 올라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고 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억발장사의 전설 깃든 엄바위 지나, 꼬부랑 할머니와 길고양이가 있는 예초리를 관통해 해안숲길로 든다.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데리고 간다. 스르륵 빠져드는 올레길 만의 흡입력이 있어, 꽉 붙들었던 자의식 놓아두고 바람결대로 펄럭이는 깃발이 된다.

옛날 제주에 갈 땐 늘 쉼표처럼 쉬었다 가는 곳이 추자도였다. 강풍을 피하고, 순풍을 기다린다는 뜻에서 후풍도後風島로 불렸던, 바람의 섬이다. 추자도楸子島라는 이름은 가래나무 열매(추자)를 바다에 뿌려 놓은 듯한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추자나무 대신 동백이 우아한 터널을 이루었다. 시멘트길을 만나고, ‘눈물의 십자가’ 이정표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계단을 따라 이른 바다 끝 바위에 거대한 십자가가 있다. 1801년 실학자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가 천주교 박해로 제주로 귀양길을 떠나게 되었다. 관노로 귀양길에 오른 정난주는 품에 안은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을 평생 죄인의 자식이자 노비로 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뱃사공 을 설득해 이곳에 배를 세웠다.

아기를 이곳에 두고 떠났으나, 마침 근처를 지나던 예초리 주민 오상선이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황경한을 거두었다. 황경한이 장성해 가정을 이루어 두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은 아직도 추자도에 살고 있다. 정난주가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두고 간 곳이라 하여 ‘눈물의 십자가’가 유래한다.

자갈해변을 지나, 깔끔하게 정돈된 천주교 성지 ‘황경한의 묘’를 지나 모진이해수욕장으로 내려선다. 오르내림 많은 코스가 끝나고 편안한 마을길로 분위기가 바뀐다. 남쪽 바다의 섬은 아직 여름인양 햇살이 카랑해 다들 땀으로 흥건하다. 깔끔한 신축 건물 카페가 있어 다가가보니 무인카페다. 양심껏 돈을 내고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에어컨 바람을 쐰다.

해가 뉘엿한데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추자도 중심 마을인 신양리 추자중학교를 지난다. 하늘은 거대한 공연을 준비하는지 양떼구름이 멋있게 햇살을 머금고 있다. 웅장한 오페라의 한 장면인양 펼쳐지는 자연의 흐름. 흔한 시골인양 평온하지만 한순간도 평범하지 않은 장면이 없는 망망대해의 가을이 지나고 있었다.

저녁은 농어회를 곁들였다. 추자도의 민박집은 대개 저녁과 아침 식사를 포함해서 예약을 받는데, 그날 잡힌 생선들 위주로 횟감이 올라왔다. 맛보다는 분위기가 좋았다. 혀끝에 감겨오는 농어회 식감도 나쁘지 않았으나, 서울 노량진보다 값이나 맛이 더 좋진 않았다.

나바론 절벽에 울리는 트로트 멜로디

다음날 아침 배가 관광객과 낚시꾼들을 풀어놓자, 다시 상추자도 일대가 떠들썩해졌다. 최영 장군 사당부터 둘러보았다. 작지만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어, 섬에서 여전히 중요한 명소로 꼽히고 있었다. 고려시대 묵호의 난을 진압하러 제주로 가던 최영 장군이 풍랑을 피해 한 달간 추자도에 머물렀는데, 이때 주민들에게 고기를 잡는 다양한 방법을 전해 주었고, 그 공덕을 기리고자 사당을 세웠다.

수채화 같은 바다와 하늘은 오늘도 이어졌고, 별다른 풍경이 없어도 걸음이 가벼웠다. 봉골레산을 우회해 노을이 예쁘다는 후포해변을 지나자 카리스마 있는 해안선이 펼쳐진다. 하추자도와는 다른, 공룡의 등골 같은 화려한 바위산이 해안선을 이루었다. 용이 노는 웅덩이 같다 하여 ‘용둠벙’이라 불리는 해안절경이다. 낚시의 성지답게 일대는 낚시꾼들과 캠핑객들이 자릴 잡고 있다.

추자도 여행의 백미인 ‘나바론 하늘길’이 여기서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나바론 요새’의 깎아지른 절벽을 닮았다 하여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나바론 절벽’이라 부른 것이 굳어져 이름이 유래한다.

계단을 따라 수직 상승하듯 고도를 높인다. 화끈한 성미의 벼랑길은 화끈한 경치로 보답한다. 압도적인 절벽, 별처럼 반짝이는 바다, 순진무구한 하늘, 축복 받은 날이다. 많은 섬을 다녔지만 이런 경치는 행운에 가까운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바론 하늘길의 위용. 아찔한 해안절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추자도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콧노래 절로 나오는 비경을 배경으로 손빈아씨가 노래를 부르고, 주민욱 기자가 영상으로 담는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지 굳은목소리가 나바론 절벽에 울린다. 젊은 지리산 사나이의 트로트 곡조에 온 산이 흥을 맞추는 것만 같다.

정자에 닿자 추자항 일대가 속 시원히 펼쳐지며, 바람이 30초 만에 땀을 말려놓는다. 바람은 향기로 지나온 길을 구구절절 털어놓는다. 물씬한 바다내음, 대서리 할매 조기 말리는 냄새, 방풍나물꽃·구절초의 달달한 향기까지 아무도 모르게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부쳤다.

추자항으로 내려서는 길, 아직 추자도를 다 둘러보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느린 걸음에서 묻어난다. 떠나는 배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추자도 편지를 꺼내었다. 향기로 새겨진 순간들이 소환되며, 세상의 모든 소음이 적막 아래로 가라앉았다.

추자도 가이드

추자도는 생각보다 넓다. 당일 여행, 1박2일, 2박3일까지 일정을 잡을 수 있다. 당일로 둘러볼 경우 상추자도의 나바론 하늘길만 걷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착장을 출발해 추자초교~최영 장군 사당~용둠벙~나바론 하늘길~영흥리~선착장을 순회하는 코스이며 5km 거리에 3시간 정도 걸린다.

1박2일로 둘러볼 경우 난이도가 있는 하추자도를 첫날에 먼저 보고,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고 수월한 상추자도를 이튿날 걷는 것이 효율적이다.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공영버스를 타고 추자대교에서 하차해, 하추자 올레길 따라 한 바퀴 걷거나, 종점인 예초리에서 올레길 따라 상추자도로 돌아오는 방법이 있다. BAC 인증지점은 하추자도 돈대산 정상으로, 표지석이 작은 편이고 길목에 있어 주의해야 한다.

길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큰 섬이라 현 위치를 모르면 길을 잃을 수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추자도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나바론 하늘길은 올레길에서 제외되어 있어, 상추자도는 올레길을 따르기보다는 나바론 하늘길 중심으로 코스를 잡아야 한다. 추자도 올레 18-1코스는 총 18km이며 난이도가 낮지 않아, 너무 만만히 보면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

BAC 인증지점

하추자도 돈대산 정상 표지석 N33 56.902, E126 19.382

교통

제주연안여객터미널(1666-0930)에서 쾌속선인 퀸스타2호를 타면 1시간 만에 추자도에 닿는다. 이 배는 추자도를 거쳐 해남우수영여객선터미널로 향한다. 해남우수영에서 이 배를 타면 추자도까지 2시간 걸린다. 퀸스타2호는 오전 9시 30분에 제주를 출발하며, 오후 4시 30분에 추자도에서 제주로 돌아오는 배편이 있다. 요금은 편도 2만3,800원.

송림블루오션호는 매일 오후 1시 45분 제주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해 2시간 만에 추자도에 닿는다. 추자도를 거쳐 완도로 간다. 완도에서 추자도행 배는 오전 7시 40분에 출발하며 2시간 40분 걸린다. 제주에서 추자행 편도 요금은 2만2,100원.

문의 : 퀸스타2호 씨월드고속훼리(1577-3567), 송림블루오션호 한일고속(1688-2100).

손빈아 추자도 취재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