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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애도, "규범 속 다른 방식으로 거주하기" ‘케이시-느루-모모와 친구들’의 애도 작업을 중심으로

장면 #1:

2021년 2월 8일에는 극작가 이은용, 2월 24일에는 교사 김기홍, 3월 4일에는 변희수 하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언급한 세 사람 이외에도 무수한 퀴어의 죽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들은 서로 다른 삶의 맥락들이 지워진 채, ‘퀴어’라는 큰 표지 하에 묶여서 설명되고는 한다.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알려진 죽음도 예외는 아니다. 이를테면 김기홍은 교사이자 정치인이었던 반면 변희수는 군인이었고, 두 사람의 성향도, 삶의 배경도 모두 무척 달랐지만, 이들은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호명할 때 늘 함께 등장했다. 2호선 지하철과 서울광장에서의 추모 액션, 신촌 연세로에서의 추모의 조각보 프로젝트, 국방부 앞에서의 변희수 하사 추모 행동 등에 함께하며 우리가 상실을 같이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다행이라는 마음이 드는 동시에, 떠나간 이들의 죽음이 ‘퀴어의 죽음’으로만 수렴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장면 #2

케이시-느루-모모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이자 장애를 가진 청소년 활동가였다. 국제앰네스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등에서 다양한 인권 의제에 대해 목소리 내는 사람이었던 그는,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한 후 남성 패싱 되던 본명을 ‘느루’로 개명했고, 여러 단체에서 ‘케이시’나 ‘모모’와 같이 다양한 활동명을 사용하였다. 케이시-느루-모모는 2017년 원가족에게서 벗어나 해방촌의 주거 공동체 ‘빈집’에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8년 9월, 케이시-느루-모모는 생을 마감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빈집’의 이웃, 주변 활동가와 친구들은 모두 케이시-느루-모모의 원가족이 자리한 장례식장에 모인다. 그곳에서 그들은 케이시-느루-모모의 개명 전 본명을 부르며 울고 있는 원가족을 보면서 모종의 낯선 감각을 경험하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같은 이유로 슬픈가?’

"퀴어를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퀴어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할 수 있을까?"

규범적 인식론에서 미끄러진 존재인 퀴어는 죽음과 애도의 장면에서도 다시 한 번 미끄러지고는 한다. 사라 아메드는 퀴어의 삶이 애초에 ‘삶’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퀴어의 죽음 역시 ‘상실’로서 인정받지 못함을 이야기한다. 이는 퀴어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에 실패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퀴어한 관계맺음을 인정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성애규범 속에 놓인 퀴어 애도는 퀴어의 비가시성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만든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는 퀴어를 애도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퀴어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애도할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이 생겼다.

루인(2013)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기억을 회고하며, 장례식을 “젠더 규범을 단속하는 친족의례”로 설명한다. 이성애가족규범이 상상하지 못하고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퀴어한 존재로서, 루인은 ‘아들-상주’의 역할을 거부하지 않고 실행하였지만 규범적 지위를 가진 그의 친척 어른들에 의해 ‘아들’로도, ‘상주’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루인의 회고에서 중요한 점은 장례식장이 친족 규범을 재생산하는 공간이라는 점보다, 퀴어한 존재인 그가 애도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규범에 포섭되지 못한 존재로서 “다른 방식으로 장례식을 겪었다”는 부분이다. 흔히 장례식장에서 규범적 존재가 조문실을 지키는 것이 애도의 핵심으로 여겨지지만, 루인은 “배제된 존재로서” 조문실을 지키며 “애도를 ‘주도’했"고 배제되지 않은 이들이 여타의 일을 책임졌으며, 그는 자신의 존재가 “친족법, 애도의 규범화에 내재한 균열을 체화하고 입증”했다고 설명한다.

"규범 속 다른 방식으로 거주하기"

루인의 회고는 아메드가 규범과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거주inhabitance”라는 공간적 개념을 들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퀴어는 단순히 규범에 따르지 못하는, 규범 속에 매끄럽게 존재하지 못하는, 실패한 존재가 아니라, 규범이 제시하는 길이 아닌 방식으로 규범 속에 “거주”하며 삶을 살아내는 다양한 시도와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퀴어의 애도를 둘러싼 규범에 대한 “공모 혹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인 틀 대신 “규범에 다른 방식으로 거주하기”의 가능성에 주목해보기로 했다. 퀴어 상실과 애도를 둘러싼 이성애규범적 지형을 짚어내는 것을 넘어, 지금 존재하는 퀴어 애도의 장면들을,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다르게” 규범에 거주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퀴어 애도에 관한 상상을 확장하고 싶었다.

🏳️‍⚧️ 케이시-느루-모모와 친구들

그러던 중, 케이시-느루-모모의 장례식 이후 케이시-느루-모모를 기억하기 위한 별개의 추모회가 꾸려졌고, 이후 추모회를 준비한 인원의 일부가 ‘케이시-느루-모모와 친구들(이하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지속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케이시-느루-모모의 기일을 기리는 것 뿐 아니라, 2018년 ‘모모 추모부스’라는 이름으로 인천퀴어문화축제 혐오범죄 규탄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퀴어 라이브러리’를 운영하거나 각종 트랜스젠더 추모 행사에서 연대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또, ‘친구들’은 케이시-느루-모모뿐 아니라 누군가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이들의 글을 모아 <사별자의 편지>라는 잡지를 제작하여 pdf 형태로 배포하거나, 트랜스젠더 인권 문제를 담은 인스타그램 필터를 제작하고, 퀴어의 건강을 기원하는 <퀴어십장생도> 포스터를 인쇄하여 곳곳의 카페에 비치하는 등, 애도 대상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기도 했다.

‘친구들’의 다양하고 넓은 활동들은 그간 퀴어 애도에 지어졌던 한계를 부수며 애도의 장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우리는 이들의 궤적을 따라가며 퀴어의 상실과 애도를 둘러싼 복잡한 맥락들을 살펴보고자 했다.‘친구들’의 구성원 마루, 노을, 하늘, 나리를 비롯해 모임의 주변에서 기억을 함께하고 있는 도도, 새길, 비오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들이 어떻게 “규범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거주”하고 있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1. 모두에게 열려 있는 애도의 장

누가 애도받고 애도할 수 있는가?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불편함이라는 건 사실, 어떤 그의 부모님에 대한 생각들이 좀 컸죠. 그래서 사실은 부모님이 개명 전 이름을 불렀는데, 그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거든요.” - 비오

케이시-느루-모모의 장례식에서 그의 부모는 그를 개명 전의 남성 패싱 이름으로, 또 ‘우리 아들’로 호명했다. 그가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본명을 ‘느루’로 바꾸었음에도,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원가족 앞에서 그의 퀴어 정체성은 말끔히 지워졌다. 이 장면은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을 당했던 변희수 하사의 죽음 이후 있었던 군의 입장 발표를 떠올리게 한다. “민간인(변 전 하사) 사망 소식에 따로 군의 입장을 낼 것은 없다”라는 육군의 입장과,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관련 제도 개선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바가 없다는 국방부의 발표는 변희수 하사의 죽음에서 ‘퀴어’를 지웠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군에서 발생한 차별과 혐오의 문제나 퀴어가 죽음을 택하게 되는 사회적 맥락들 역시 사라졌다.

그런 한편, 앞서 제시한 사례들과 반대로 ‘퀴어’라는 표지만 남게 되는 죽음도 있었다. 김기홍과 가까운 위치에서 함께 일을 했던 새길은, 그의 죽음 이후 그가 ‘인권활동가’ 내지는 ‘성소수자 활동가’로 설명 되는 것이 “얄팍하다”고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기홍이 정치를 시작하거나 인권 운동에 참여했던 이유는 자신의 교사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적 삶의 투쟁이었음에도, 언론이나 인권 단체 등에서 그를 정치인이나 교사로 호명하는 대신 ‘퀴어 활동가’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삶에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퀴어는 죽음 이후에도 퀴어로서의 삶을 인정받지 못했다. 실재하는 퀴어에 대한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퀴어에 대한 차별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죽음 이후에 ‘퀴어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장례식장에 온 원가족의 말을 통해 등장하는 케이시-느루-모모가 슬퍼하는 부모의 ‘아들’이었다면, ‘친구들’과의 인터뷰에서 등장하는 케이시-느루-모모는 그가 가지고 있던 다면적인 모습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개인이었다. 이들의 말 속에서 케이시-느루-모모는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이자 활동가이자 4개 국어를 할 줄 알며 탈가정을 하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한 명의 고유한 주체였다.

한편,‘친구들’은 케이시-느루-모모의 죽음 뒤에 그의 트랜스젠더 정체성, 탈가정한 상태, 난치성 질환, 불안정한 노동 조건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음을 짚었다. 나아가, 인터뷰 중 비오는 “퀴어로 산다는 것”이 “뚝 떨어진” “단순히 정체성”만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인 영역”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요소임을 말하기도 했다. 이 대목은, 누군가의 삶이나 죽음은 ‘퀴어’라는 한 가지 정체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러 정체성을 나열하는 일만으로도 온전히 설명해 낼 수 없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케이시와 제가 생각하는 케이시가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하고 느꼈어요. (…) 제가 생각하는 케이시는 위태위태하고, ‘아 어떻게 하지’ 진짜 그런 생각을 많이 들고… 그래서 뭔가 약간 주변에 강인하게 보였던 모습이 뭔가, 사실은 강인해야만 살 수 있는 구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 나리

케이시-느루-모모와 이웃 사이었던 나리 역시, 주변에는 주로 강인한 모습으로 보여지던 케이시-느루-모모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위태위태”해 보이던 것을 떠올리며, 입체적인 존재로서의 그를 불러낸다. 그런 한편, “주변에 강인하게 보였던 모습”이 “사실은 강인해야만 살 수 있는 구조” 때문이 아니었을지 물으며 말끝을 흐리기도 한다. 이는 케이시-느루-모모를 어떠한 당사자성으로만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조건들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들’을 비롯해 그 주변에서 케이시-느루-모모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를 몇 개의 정체성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졌던 퀴어, 탈가정 청소년, 장애인 등의 정체성이 만들었던 일상적 위치성에 관해 고민했고, 그가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조건들을 곱씹었다.

“근데 아무도 없는 장례식장에 저희 해방촌 빈집 사람들이 한 10명?이 텅빈 데 다같이 모여 앉아가지고, 케이시 어머니한테 케이시가 어떻게 활동하고 지냈는지, 집에서 얼마나 요리를 잘 했는지 이런 걸 다 말씀드렸어요. 왜냐면 케이시가 탈가정을 한 지 한 1-2년? 정도 됐을 때였기 때문에.” - 새길

장례식장에 모인 케이시-느루-모모의 원가족과 ‘빈집’의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그리고 ‘빈집’ 일원들은 케이시-느루-모모의 어머니에게 그의 일상에 대해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의 혈연가족임에도, 정작 그가 죽기 전 그가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떤 요리를 잘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빈집’ 식구들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케이시의 죽음이 확인된 이후에도 경찰은 가장 먼저 원가족에게 연락을 취했고, 부검 여부나 장례 절차와 관련된 선택 역시 모두 원가족에게 결정권이 주어졌다. 인터뷰를 하며 ‘빈집’의 식구들이 “우리에게 애도하기에 너무 필요한 인형”마저도 유가족에게 전달해야 하냐며 고민했던 시간에 대해 전해 듣기도 했다. 글의 초입에서 살펴본 것처럼,‘빈집’ 구성원을 포함해 케이시-느루-모모와 ‘이웃’이자 ‘식구’로 그와 죽음 이전에 가장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혈연 관계에 있는 이들이 감정의 핵심 축을 구성하는 장례식장의 공간에서 묘하게 불편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이성애 로맨스를 중심으로 꾸려진 정상가족 각본을 따르지 않는 퀴어의 관계 맺음은 부차적이고 비공식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며, 이는 죽음과 애도의 장면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케이시-느루-모모의 장례식은 “퀴어로 애도받지 못하는” 케이시-느루-모모를 발견하게 되는 곳인 동시에, “케이시-느루-모모를 애도하지 못하는” 퀴어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낯선" 장례식에서 "열린 추모회"로

하지만 케이시-느루-모모의 주변인들은 장례식장을 뒤로 하고, 케이시-느루-모모를 기억하는 별도의 추모회를 꾸렸다. “우리도 불편하고, 그 사람들(유가족)도 어쩔 줄 모르겠”으니, “우리가 따로 추모하는 행사를 열자”라는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케이시-느루-모모가 생전 활동하던 단체의 활동가들이 모인다. 케이시-느루-모모의 사진과 이야기를 모으고,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던 그의 이름을 연결해 ‘케이시-느루-모모의 추모회’라는 이름도 붙였다. 이후 ‘케이시-느루-모모와 친구들’이라는 모임명으로 이어지게 된 이 행사는 장례식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먼저, 추모회는 배리어프리한 공간에서 비건식과 함께 열렸다. 케이시-느루-모모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밥과 토마토밖에 없었”던 장례식장과 완전히 상반되는 특징이다. 케이시-느루-모모가 참여했었던 인천 퀴어문화축제의 대책위원회에서도 조화를 보내며, 퀴어 활동가로서의 케이시-느루-모모를 존중하고 애도했다. 추모회는 케이시-느루-모모가 가지고 있었던 휠체어 사용자로서의 정체성이나 비건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섬세한 고려에 더해, 그가 생전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이나 지향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퀴어들이거나, 모모를 알거나, 그냥 이 소식을 듣고 안타까우신 분들이 되게 어우러져서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고, 못 오시는 분들은 아예 구글 링크로 (이야기를) 받아가지고 대신 읽어드렸었거든요. 나름, 너무 이렇게 가라앉지도 않고, 어느 정도 되게 경청하는 분위기가 아주 컸었던 걸로 기억해요. 사람이 되게 많았, 한 사십명 정도 있었던 거거든요. 거기가 2층 꽤 큰 곳인 데도, 앉아 있었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 마루

추모회는 1, 2부로 나누어 진행 되었다. 1부에서는 케이시-느루-모모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둔 채 벽에 붙은 그의 활동 사진에 메시지를 함께 남기고, 2부에서는 케이시-느루-모모가 활동하던 단체 구성원들이 자전거 뒤에 휠체어를 연결하여 그가 속해 있던 단체를 돌아 다녔던 ‘기억 달리기’라는 활동의 과정을 사진으로 소개했다. 또, 추모회에서 같이 나누고 싶은 메시지를 사전에 받아 낭독하기도 했고, 발언하고 싶은 이들은 자유롭게 손을 들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중간중간에 도착하는 이들도,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케이시-느루-모모의 친구들이 혈연 가족의 슬픔을 보고 낯선 감각을 느끼며, “우리가 같은 이유로 슬픈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던 장례식장과 다르게, 이러한 추모회에서는 케이시-느루-모모의 친구들 뿐 아니라, 참여한 모든 이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상실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케이시-느루-모모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추모의 시간은 누군가의 감정이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꾸려졌다. 물리적으로 추모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 역시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추모회가 원가족과 진행된 장례식과 별개로 열렸다고 해서 이 행사가 원가족이 느끼는 슬픔의 감각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추모회를 꾸린 케이시-느루-모모의 친구들은 그의 원가족이 장례식장에서 그를 충분히 그리워할 수 있도록 자리를 떠나서 활동가나 퀴어들이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추모회를 따로 기획했다. 또, 케이시-느루-모모의 원가족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함을 인정하고, 추모회를 포함한 모든 활동과 관련하여 언론사를 “일체 만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하며 그들이 상실을 경험하는 방식을 존중했다.

추모회를 준비한 케이시-느루-모모의 친구들은 ‘누가 애도 받고 누가 애도할 수 있는가’에 한계를 짓지 않았다. 이러한 ‘케이시-느루-모모의 추모회’의 특성은 이후 ‘케이시-느루-모모와 친구들’로의 활동 지속 과정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케이시-느루-모모의 부고를 뒤늦게 전해들은 노을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여기서 그냥 내가 같이 뭔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친구들’을 찾아갔다. 노을은 케이시-느루-모모와 사적 친분이 있는 것도, 그와 함께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을은 ‘친구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지금까지 함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하늘은 케이시-느루-모모의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지지를 표하시며, 활동에 금전적 후원을 해주시기도, 고마움을 드러내시기도 하는 점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원가족과의 단절을 선택하는 대신 그들이 경험 했을 상실을 존중하기로 결정 하였고, 원가족인 이러한 ‘친구들’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함께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에게나 열린 애도의 장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이러한 모습은 다시 한 번, 누구에게나 열린 애도의 장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친구들’은 고인과의 관계가 어떠했든 누구나 애도에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애도 작업을 연결되어 함께 수행하지 않더라도 느슨하게 연결된 채로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상상을 실현하고 있었다.

2. 넓혀진 애도의 시공간

언제, 어디서 애도할 수 있는가?

그간 퀴어가 온전히 애도 받을 수 없고 온전히 애도할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최근의 죽음들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고인의 퀴어함을 지우지 않으면서, 퀴어한 관계 속에서 상실을 경험한 모든 이를 초대하는 애도의 장을 만났다.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기 위한 국방부 앞에서도,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의 지하철과 시청 광장에서도, 퀴어는 지워지지 않은 채로 애도할 수 있었다.

“리틀 퀴퍼 같았고요. (웃음) 지하철 시간 맞춰 타기만 하면 다 무지개였잖아요. 시청역에 내리기 전에 활동가들이 칸마다 서서 다같이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는 구호를 외치고 내렸는데, 되게 신났고요. (...)- 새길

자긍심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퀴어 퍼레이드와 애도의 정동이 흐르는 추모현장에서 비슷한 감각을 느꼈던 것에는 일상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감정을 터뜨릴 수 있다는 ‘해방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장들이 “퀴퍼 같았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애도가 ‘그 날, 그 곳’만 예외적으로 허락된 것이었음을, 그 외의 시/공간에서는 자리할 장소가 없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성소수자의 공간은 특정 시간대만을 중심으로 공간적으로 밀집하는 ‘한시적 가시 경관(limited time visible landscape)’의 특성을 보이며(이서진 2007), 삶에서 퀴어의 ‘장소 없음’은 죽음 이후에도 애도할 수 있는 ‘장소 없음’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공간을 비집고 예외적인 시공간이 만들어져도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곳에서 사별자들이 온전히 무언가를 해소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평상시에 이런 종류의 기억이나 생각 같은 게 내가 생각을 안하고 싶다고 사라지진 않잖아요. 저한테는 친구는 퀴어랑 아무 상관이 없는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집근처에서 같이 다니는 상황에서 그냥 길을 보면 떠오르니까 간판을 보면 떠오르고. 사실 그러다 보면 저한테는 연쇄적으로 그 죽음들이 함께 떠오르는 건데, 기댈 곳이 없어요 사실은. (...)” - 도도

한편, 이처럼 상실 이후 애도할 수 있는 공간 이외에 ‘시간’을 가지는 것 역시 중요하다. 오랜 시간 축적된 삶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일은 한순간에 마무리 지어질 수 없기에, 일시적으로 허락된 시간 속에서 충분한 애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도가 말하는 것처럼 장례식이나 추모행동과 같이 ‘주어진 애도의 시간’ 바깥에서는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죽음과 상실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퀴어를 애도하는 일이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온라인 공간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이 역시 역시 죽음 직후의 시간, 혹은 매년 기일 전후로 제한되어 형성되고 있다. 고인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특정한 날에만 찾아오지 않고 일상 속에서 불쑥 떠오르고 머무름에도, ‘예외적 시/공간’이 사라진 후 애도의 정동은 죽음과 상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벽장에 다시 갇히게 된다.

“정기 모임은 없죠. 없다고 할 수 있죠. 흐흐흐. 그냥 작업하고 만들고 무슨 행사를 하고 그런 것들이 그때그때마다 있는데 그럴 때 만나게 되면 케이시 모임에서 이런 거 하고 싶다고 이런 얘기가 나오고 그러면 케이시 모임 방에서 ‘우리 이런 거 해봐요~’ 얘기가 나오고 그러면 우리 이거 하자 하면은 날짜를 잡아서 모임을 해서 이렇게 추진을 하고 그런 식으로 진행을 해온 것 같아요.” - 하늘

“케이시 얘기도 뭐 가끔 집에서 하고 그랬거든요. 사실 그때 (빈집에) 살던 사람 반은 케이시랑 알고 반은 케이시를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케이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약간 저 사람은 뭔데 저렇게 활동을 많이 했지? 약간 이런 생각도 하고 (…) 모르는 사람인데 계속 이야기하고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뭔가 다 막 엄청 투쟁적이고 근데 또 에너지 넘치고 그런 모습들이 좀 그래도 계속 이야기가 되는 거는 저는 그게 좋았어요. 누구하고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 - 하늘

그러나 ‘친구들’은 애도가능한 예외적 시공간을 열어젖히고, 정해진 시공간에만 허락된 애도를 일상의 시공간으로 펼쳐갔다. 기일이나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정기 모임도 없이 언제든 케이시-느루-모모와 함께 하고 싶을 때면 누구든 말을 꺼낼 수 있다. 비슷하게, 그에 관한 기억은 그가 생활했던 주거 공동체 ‘빈집’에서도 꾸준히 흐르고 있다. 그와 함께 거주했던 빈집 구성원들 중 절반이 떠났으며, 이제 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자유롭게 흐르는 기억 속에서 케이시-느루-모모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또, 추모회를 진행했던 것과 별개로 빈집 구성원들은 케이시-느루-모모가 살던 방을 추모의 공간으로 꾸며두고, 빈집으로 사람들을 직접 초대하기도 했다. 사적인 장소로 상상되는 주거 공간을 개방한다는 것, 누구든 방문해 케이시-느루-모모를 추모할 수 있도록 환대를 베푼다는 것은 단순히 예의나 친절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빈집’은 물리적으로 열려있어 누구나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애도의 시공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 곳이었다.

케이시-느루-모모가 생활하고 활동했던 공간이 아닌, 카페나 바와 같이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공간, ‘친구들’이 일하고 있는 공간에도 그의 흔적이 담긴 문집과 엽서들이 비치됐다. 카페 ‘트랜스’에 앉아있는 동안, 서로 대화를 하던 손님들이 ‘친구들’이 제작한 엽서들, 실크 스크린 작품들을 구경하고 <사별자를 위한 편지>를 집어들어 읽는 모습을 보았다. 골목을 지나가다 트랜스젠더 플래그를 보고 반가워하며 카페로 들어오는 손님도 있었고, 케이시-느루-모모를 알았던 사람이 우연히 그의 조각들을 보고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카페 ‘트랜스’의 풍경들

이렇듯 여러 공간에 흩뿌려져 있는 케이시-느루-모모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친구들’의 기억은 일시적으로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지 않고, ‘친구들’ 각각의 삶의 연속선에서, 누군가의 삶 곁에서 펼쳐지고 있다. 다시 말해, 케이시-느루-모모의 삶과 죽음은 공간과 시간의 선에서 특정한 ‘점’에 머물다 떠나지 않고 선상에 자유로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렇게‘친구들’이 흐려둔 예외적 시공간의 경계는 일시적인 ‘해방감’을 넘어, 언제든 울고 싶을 때 편하게 울 수 있도록, 감정을 털어놓고 싶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우며 일상적인 ‘편안함’을 제공한다.

3. 하나로 모이지 않는 정동

어떻게 애도할 수 있는가?

케이시-느루-모모의 죽음 이후의 감각들을 묻는 질문에, 누군가는 분노를, 누군가는 억울함을 느꼈다고 답했다. 또 누군가는 고인과 생전 마주한 기억은 없어서 그저 그를 더 알아가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같은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하면서도 마루는 케이시-느루-모모를 떠올리며 울고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즐겁게 행진을 했다. ‘친구들’ 사이의 폭넓고 다양한 감정은 재단되지 않은 채, 감정 그대로 존중되고 있었다. 개인이 느껴야 할 이상적인 감정의 모양이 제시되지도, 정치적 변화를 이끌고자 케이시-느루-모모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포장되지도 않았다.

“내가 그들과 비슷한 이유로 슬픈가, 나는 어떤 것에 슬픈가, 혹은 이 슬픔이 무례하지는 않은가, 이런 걸 되게 많이 고민했었던 것 같아요. 2018년 하반기에 그런 고민이 제일 많았던 시기였던 것 같고... (중략) 그 해에 얼마 안 돼서, 그거 마루님이 진행했던 건데, 인권재단 사람에서 했었던 추모회가 저희한테는 되게 몇 안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고…” - 비오

동시에,‘친구들’은 스스로와 서로의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던 이들은 이곳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비오의 말마따나‘친구들’의 추모회는 규범 밖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몇 안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고, 위로 받지 못하거나 무뎌지는 감각에 불안해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사례로, ‘친구들’의 작업 중 <사별자를 위한 편지>를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사별자를 위한 편지>는 “서로가 사별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나누고 서로를 지지할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떠난 이를 추모하고 마음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친구들’이 해시태그 캠페인과 메일을 통해 모은 글을 진(zine, 잡지)의 형태로 엮은 것이다. 이 곳에 글을 실은 이들은 케이시-느루-모모를 호명하며 진솔한 마음들을 담아 내기도 하고, 꼭 케이시-느루-모모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그리워하는 대상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내 친구들의 죽음은 결국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노조탄압, 실업, 혐오, 빈곤과 맞물려 있었다. 이것들은 친구들의 문제가 아니었고, 우리들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이다. 친구, 타인의 죽음이 더이상 본인과 무관하지 않기에 우리는 더 자주 만나고 싸우고 놀아야 한다. 최대한 시끄럽고 떠들석하게 놀고 싸워야 한다. 나는 앞서 자신의 대지를 구축하고 가꿀 수 있는 존재는 성숙하거나 많이 가진 존재이며 대체로 우리는 가진것 없고 미숙하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모이고 관계가 쌓인다면, 함께 싸우며 서로의 대지를 더 살만한 땅으로 가꾼다면 밤하늘의 별들이 공허한 블랙홀을 만들며 사라지는 것을 그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사별자를 위한 편지>에 실린 나리의 글

“나는 왜 그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으려 할까. 그를 기억하는 자리에는 많은 이가 모였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에게 어떻게 웃었는지 기억했고, 부족한 자신에게 얼마나 따뜻했는지 기억했다. 그때 알았다. 그는 얼굴의 주름으로 이 사람들을 바꾸어 놓았구나,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직면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었구나. 이 뒤늦은 기억을 붙들고 있는 이유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인 것 같다. 그처럼 불같이 분노하고 싸우는 얼굴, 실수한 사람을 감싸 안는 따뜻한 얼굴을 모두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와 비슷한 다른 누군가를 찾고, 또 거리를 두고 응원하기만 한다면, 그의 다정한 혁명은 곧 그쳐 버릴지도 모른다.” - <사별자를 위한 편지> 중 도도의 글

이러한 글들과 더불어 나리나 도도와 함께했던 인터뷰는 ‘친구들’이라는 공간에서 교차된 감각들이 개개인에게 가져온 마음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전까지 사회구조에 큰 관심이 없던 나리에게는 ‘친구들’에서의 활동이 퀴어 의제에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었고, ‘강인한’ 고인을 보내고 난 뒤 기억을 정립하지 못해 힘겨워했던 도도에게는 케이시-느루-모모에 대한 다면적인 기억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즐거운 애도의 상상

한편, ‘친구들’이 행하는 애도의 실천은 마치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퀴어 투쟁’의 장을 제공”하는 퀴어퍼레이드처럼, 즐겁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밀어내지 않으며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퀴어의 죽음이 차별과 고통이라는 메시지만으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거리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 모두가 부담없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고 기획하고 있었다.

“올해는 약간 거창한 걸 꿈꿨어요. 어쨌든 케이시가 어쨌든 공간에 대해서 소거당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 자신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해서 - 아니 좀 억울하고 짜증 나지 않느냐. 그럼 보란듯이 좋은 공간에서, 좋은 공간을 점유해서, 약간 축제처럼 추모를 해보자 이런 거창한 포부가, 갖고 있을 거는 갖고 있었거든요.” - 나리

“근데 너무 틀에 박힌 추모를… 마루님도 활동가다 보니까, 막 보도자료 쓰듯이, 카페들에 메일 보내서 막 이러길래, 아 좀 말랑말랑하게 하자! 해서. 다들 인스타 안 해요? 인스타 스토리 필터 하나 만들면 전국에 쫙 퍼질 수 있다. 뭐하러 방방곡곡에 우편을 보내냐. (…) 사람들이 뭐라도 해야 되니까 의무적으로 하고 있을 때, 할 거면 재밌게 하자? 이런 걸 했죠.” – 새길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필터 홍보 게시물

‘친구들’은 아기자기한 인스타그램 카메라 필터를 제작하여 선거 후보 사진에 적용한 이미지를 업로드하기도 하고, 퀴어 서적을 전시하고 함께 읽는 ‘퀴어 라이브러리’ 행사를 개최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현실화 되지는 못했지만, 케이시-느루-모모의 존재를 축복할 수 있는 일종의 ‘축제’와 같은 추모행사를 기획하며, 퀴어 퍼레이드와 같은 퀴어의 ‘공간 점유’에 대한 상상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획들은 ‘친구들’의 구성원들이 애도하는 방식인 동시에, 고인을 생전에 알지 못하던 사람까지도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애도와 기억’에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아가, 고인을 ‘즐겁게’ 기억하는 것은 고인을 ‘좌절과 상실’ 등으로만 환원하지 않는 것을 넘어, 고인을 ‘온전히’ 기리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케이시-느루-모모의 추모회’에서 참여자들이 케이시-느루-모모가 춤추는 영상을 보며 그의 웃음기 가득한 모습을 함께 나눈 시간이, 마루는 그를 새로이 알게 된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친구들’의 애도가 언제나 축제처럼 즐거운 것은 아니더라도, 이들은 관성적이고 무거운 애도의 실천을 넘어, 즐겁고 재미있는 실천을 고민하며 이어나가고 있다.

‘를 위한’ 친구들이 아닌, ‘와’ 친구들

‘친구들’은 케이시-느루-모모가 아닌 ‘또 다른’ 케이시-느루-모모에게도 손 내밀고 기억하며 연대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으며,‘와 친구들’이라는 이름처럼, 생전 고인이 마음을 두고 함께 했을 곳에, 지금도 케이시-느루-모모의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탈가정 청소년이었던 케이시-느루-모모를 기억하며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 자신과 주변인의 마음을 돌보기 어려운 이들을 지원하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 ‘마음연결’에 기부를 한다. 최근 김기홍 선생님의 추모 현장에서도, 변희수 하사의 추모 현장에서도 이들은 고인이 생전 했을 법한 일들을 친구의 이름으로 다정히 함께했다. ‘친구들’은 퀴어의 삶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구조적 변화를 외치는 공간에서 케이시-느루-모모의 삶과 닿아 있는 삶들 곁에서, 케이시-느루-모모가 지향했던 가치관들을 여전히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서로의 ‘친구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는 이 계기(추모회)로 빈집 분들하고 (연결고리가) 생겼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평지 이사할 때도 초대해 주셔가지고 갔었던 기억이 나요. 그래가지고 저는 사실 주거 공동체와 어떤 연관관계가 없는 상태였는데 덕분에 이렇게 생긴 거죠. 관계가 생겼고 그래서 6월에 이런 경의선 공유지에서 아마 퀴어 관련된 그 영화하고 그 비닐하우스 그런 데서 한 번 한 적이 있었고 있잖아요. 그때도 이제 오라고 해서 간 거였거든요 이런 거 하니까 오세요. 시간 내면 오세요 그래서 약간 관계가 맺어진 것도 되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 마루

“내 친구들이 그렇게 지긋지긋할텐데도 어쨌든 계속 기억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무엇보다 마루님이라는, 케이시가 아니었다면 평생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알 수 없었던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SNS를 보고 있으니까, 자주 힘들다고 올리시거든요. 특히 케이시 기일되면 너무 힘들어하시고. 그 사람도 지키고 싶고.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런 마음도 있는 거 같고. (…) 이제는 솔직히 말하면 케이시를 기억하는 것보다, 케이시를 기억하고 가끔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도, 지금 얘기하다보니까 있는 것 같아요.” - 새길

한편, ‘친구들’은 그 단체명과 같이, 서로의 친구가 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케이시-느루-모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구성원들은 각자 다른 환경과 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친구들’로 모이기 전까지 접점 하나 없었을 지 모르지만, ‘친구들’은 이제 서로에게 위로와 에너지를 주는 새로운 관계가 되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케이시-느루-모모를 위해, 기억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친구들’은 서로를 살피며 함께하고 있다.

애도 규범에 “다른 방식으로 거주하기”

‘친구들’의 애도는 케이시-느루-모모를 ‘퀴어’ 죽음으로 기억하지 않으면서 애도의 각본과 다른, 퀴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퀴어가 지워진 채의 죽음으로도, ‘퀴어’만이 남은 죽음으로도 아닌, ‘케이시-느루-모모’로 기억하고 애도했다. 또 케이시-느루-모모에 대한 기억을 모두에게 열어 두며, 애도의 시간을 열어 두며, 입체적인 기억으로 나아갔다.

‘친구들’의 애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케이시-느루-모모에 대한 기억은 말과 글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말하기’는 메모리얼과 달리 물질성이 없기에 필연적으로 불안정하다. 언제든 휘발될 수 있는, 취약한 방식일 수 있다. 그러나 퀴어의 역사는 이 불안정한 ‘말하기’를 통해 전해져왔다. 먼저 퀴어한 삶에 ‘데뷔’한 이들의 삶을 말과 말로, 살과 살로 마주하며 그와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퀴어의 역사는 그렇게 계승됐다. 애도 역시 고정되고 안정되지 않더라도, 그것 자체가 갖는 의미가 있다. 퀴어가 살아온 기억을 전수했던 것처럼 살아왔던 기억 역시 말과 말을 통해 이어질 수 있다.

‘친구들’은 인터뷰를 하며, 자신들이‘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거듭 말했다. 공고한 사회적 기억으로 애도하길 바랐다면 ‘메모리얼’은 강한 힘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각각의 삶의 공간에서 고인의 삶을 온전히 기억하며 이어갈 수 있는 법을 고민했고, 그러길 바랐다. 고인의 삶을 영속적으로 기억하기보다는 그를 알아가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일상 속에서 그의 삶이 향하던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기를 바라는 마음 속에서 말하고 또 행했다.

따다닥 열리는 3단 구급 약상자에 화장품을 넣어두던, 빵을 자주 구워 먹던, 어디선가 봉을 찾아와서 퀴퍼 깃발을 만들던, 잠자리 옆에 프라이드 곰돌이와 책들을 늘어놓았던, 싫어하는 중국어 영화와 드라마를 중국어 공부를 위해 참고 봤던 케이시-느루-모모의 삶이 ‘친구들’의 입을 통해 또 한 번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의 삶이, 또 수많은 퀴어의 삶이 앞으로도 넓게 풀어 헤쳐진 채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기를 바라며 글을 닫는다.

제작: 경하🦙 | 연구: 민기🦎 동현🦔 경하🦙

본 연구는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21-1 문화기술지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실 경우, midhiver@yonsei.ac.kr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대표 배경 이미지는 ‘케이시-느루-모모와 친구들’의 ‘사’님께서 제작 후 배포해주신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나 있다>이며, 추모회 사진은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추모회 라이브 영상을 캡처하였습니다. 사용한 무료 이미지는 아래 출처가 명시 되어 있으며, 이외는 직접 촬영하였습니다.

Credits:

Created with images by AlexandruPetre - "fantasy architecture forward" • plantsandanimals1 - "garden opening door" • Jordan_Singh - "planet mother earth" • JacksonDavid - "hands hand together" • terimakasih0 - "doorway beach opening" • asklo - "flower milkweeds silky" • Kranich17 - "jeans trouser leg blue" • Norm_Bosworth - "sandstone landscape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