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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폭포 왕국’은 어디일까? 민병준 칼럼

산행 준비물 중 지도는 필수다. 요즘엔 종이 지도보다도 모바일 등산용 앱을 많이 활용한다. 손바닥 안에 우리나라 온 산이 다 들어있는 셈이다.

조선 지도의 결정체인 대동여지도. 이 지도로 백두대간 종주나 설악산 산행이 가능할까? 대동여지도 축척은 대략 1:160,000이다. 현대 산행용 지도는 1:50,000이나 1:25,000이고, 도로 교통지도는 1:100,000이 인기 있다. 따라서 대략 1:160,000인 대동여지도는 등산용이 아니라 ‘조선 도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대동여지도로 백두대간 종주나 설악산 산행엔 난감하다.

금강산의 명성에 뒤졌던 설악

조선시대 설악은 손꼽히는 명소는 아니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 같은 유명 선비가 오세암이나 영시암에 머물렀지만, 같은 강원도 백두대간에 있던 금강산의 인기엔 밀렸다. 설악을 아는 선비들도 금강산을 구경하고 나서야 일부만 남쪽의 설악을 들르는 식이었다. 설악이 메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산행기인 유산기(遊山記)나 경치를 노래한 시문(詩文)도 상대적으로 적다. 그림도 많지 않다. 〈인왕제색도〉로 잘 알려진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년)은 〈금강전도〉, 〈단발령 망금강〉 등 금강산 그림은 많이 남겼으나, 설악산과는 인연이 없었다. 김창흡의 제자로서 스승의 초상화도 그렸을 뿐만 아니라 금강산도 같이 여행했던 사이였음을 생각하면 아쉽다.

다행히 산수화·풍속화 등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남겼다. 정조의 명으로 1788년(정조 12)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을 여행한 결과물인 《‎김홍도필 금강사군첩》엔 설악 풍경들이 존재한다. 토왕성폭포를 그린 〈토왕폭〉, 천불동 입구의 경관을 그린 〈와선대〉, 울산바위와 흔들바위가 묘사된 〈계조굴〉 등이 그것이다.

김홍도필 금강사군첩의 토왕폭.
김홍도필 금강사군첩의 와선대.

산마다 표정을 달리한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백두산. 흰 눈썹으로 신비롭게 표현했다
대동여지도 금강산.1만2천봉을 화려하게 표현했다.

다시 지도로 돌아가면, 대동여지도에서 산줄기는 산봉우리를 연이어 솟은 톱니 모양으로 표현했다. 산의 특징적인 표정도 그려 넣었다. 백두산은 흰 눈썹으로 신비롭게, 금강산은 일만이천봉을 화려하게, 오대산은 이름 따라 다섯 봉우리를 더 눈에 띄게 표현하는 식이다.

대동여지도 지리산. 육산임에도 골산으로 표현했다.

남한 백두대간 최고 미모인 설악산은 어땠을까? 애석하게도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2,600여 개 산 중에서 별로 특별하지 않다.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육산(肉山)인 오대산과 지리산을 마치 골산(骨山)처럼 표현했음에도 골산인 설악은 평범하다.

대동여지도 설악산. 평범하게 표현했다.

설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고산자에게 서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 대동여지도 설악산엔 눈에 띄는 표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폭포다.

흔히 우리나라 3대 폭포라 하면 개성의 박연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를 꼽는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엔 개성 천마산 기슭에 박연폭포 관련 지명이 안 보인다. 금강산에도 만폭동(萬瀑洞)이라는 명칭만 있을 뿐이다. 구룡폭포는 없다.

폭포 이름 드문 대동여지도…설악엔 무려 2개

그런데 설악엔 무려 두 개의 폭포를 표기했다. 둘 다 이름이 ‘대폭(大瀑)’이다. 현재 설악에 ‘대폭’이란 명칭의 폭포는 없다. 그렇다면 어느 폭포일까. 짐작했다시피 하나는 외설악의 토왕성폭포요, 하나는 내설악의 대승폭포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12,000여 지명 중 폭포 명칭은 10개가 안 되는데, 토왕성폭포와 대승폭포가 당당하게 대동여지도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대동여지도 설악산. 대폭으로 표기된 토왕성폭포와 대승폭포.

대동여지도를 자세히 보자. 설악산 글자 북쪽에 표기된 대폭은 토왕성폭포다. 외설악의 대표 폭포인 토왕성폭포 길이는 상·중·하단 합쳐 총 320m나 된다. 직폭(直瀑)이 아니라 연폭(連瀑)이다. 남한에선 최장이다. 남쪽은 물론이요, 북녘 자료도 샅샅이 뒤졌는데 이보다 긴 폭포는 못 찾았다.

조선 선비의 유산기엔 설악동~신흥사 구간에서 토왕성폭포를 목격하는 광경이 자주 보인다. 김홍도의 〈토왕폭〉도 설악동 길목에서 그린 것이다. 토왕성폭포 아래까지 접근한 유산기는 아직 못 봤다. 2010년대 중반에 설치한 ‘토왕성폭포 전망대’까지만이라도 조선 시대에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면 우리나라 3대 폭포에 토왕성폭포를 넣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한계산 ‘대폭’은 내설악 대승폭포

내설악의 대폭은 대승폭포다. 지금의 내설악 지역을 대동여지도엔 한계산(寒溪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안산(1,430m) 일대를 따로 한계산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 한계산 표기 서쪽의 대폭은 대승폭포다.

승경(勝景)은 관람 포인트도 중요하다. 토왕성폭포가 거대한 규모와 미적인 구도를 갖췄음에도 우리나라 3대 폭포에 들지 못한 것은 아마도 접근이 어려워 실제 정보가 많지 않았던 탓도 있으리라.

반면에 내설악 대승폭포는 조선의 선비들이 애용하던 한계~대승령~흑선동계곡~백담계곡 코스에 있고, 관람 포인트도 갖췄다. 이름도 폭포를 구경하는 포인트라는 의미의 관폭대(觀瀑臺)다. 여기선 길이 88m의 직폭을 감상할 수 있다.

대승폭포 관폭대 구천은하 각자.

대승폭포를 찾은 선비들이 시를 지었을 관폭대 너럭바위엔 ‘구천은하(九天銀河)’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구천(九天)’과 ‘은하(銀河)’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여산 폭포를 바라보며(望廬山瀑布)〉의 구절 일부다.

향로봉에 햇빛 비쳐 보랏빛 안개 서리고(日照香爐生紫煙)

아득히 바라보니 폭포가 강에 걸렸네(遙看瀑布掛前川)

물줄기 날듯이 쏟아지니 길이가 삼천 자(飛流直下三千尺)

마치 은하수가 구천으로 쏟아지는 듯(疑是銀河落九天)

-이백의 시 〈여산 폭포를 바라보며(望廬山瀑布)〉

‘구천은하’ 글씨는 조선 선조 때 명필 양사언 작품으로 알려지다가 최근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글씨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설악을 찾아 〈한계산기(寒溪山記)〉, 〈곡연기(曲淵記)〉 등을 남긴 김수증은 영시암에 은거했던 김창흡의 큰아버지다.

다른 산에 있다면 ‘대표’ 자격 폭포들 수두룩

폭포 표기를 거의 안 한 대동여지도에서 고산자가 설악산 구역에 폭포를 2개나 표기했다는 데서 짐작하듯이 설악은 ‘폭포 왕국’이다.

구곡담계곡의 쌍룡폭포.

설악엔 2대 폭포인 토왕성폭포와 대승폭포 외에도 설악동의 육담폭‧비룡폭, 천불동의 오련폭‧양폭‧음폭‧천당폭‧염주폭‧칠선폭, 구곡담의 관음폭‧쌍룡폭‧용손폭‧용아폭, 십이선녀탕의 승폭·응봉폭‧두문폭포, 백운동의 백운폭포, 오색의 설악폭‧독주폭……. 다른 산에 있었다면 대표로 대접받았을 폭포를 생각나는 대로 꼽아도 수십 개다.

폭포 표기에 인색한 대동여지도에 폭포가 2개씩이나 표기된 설악산, 이름도 ‘크다’는 대폭, 그리고 골짜기마다 여러개 씩 걸린 폭포들…. 설악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 최고의 ‘폭포 왕국’이다.